목회편지

목회편지2022.07.24. - 김영학 [한국교회 첫 해외 순교 선교사]

202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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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학 - 한국교회 첫 해외 순교 선교사


"이 멍청이 새끼들아, 저리 꺼져!"


대낮부터 취한 영학은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이 난봉꾼을 알아서 비켜가건만, 어떤 한 무리가 자기에게 다가와 종이 한 장을 주려 했기 때문입니다. 겁내기는커녕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괜시리 자존심이 상한 영학은, 물 한 바가지를 퍼서 그들에게 냅다 퍼부었습니다. 그들을 발로 걷어차고, 종이를 빼앗아 찢어버렸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들은 말했습니다. "형님,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어야 구원 받아요!"


다음날 술에서 깬 영학은 종이에 적힌 집회장소에 갔다가, 그곳에서 복음을 듣고 주님을 만납니다. 그가 바로 훗날 한국교회 최초의 해외 순교 선교사가 된 김영학 목사입니다.


1877년 황해도 금천군 양반댁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식민지가 되어 가는 조국을 보며 현실을 도피했고, 주색잡기로 20대를 다 허송한 터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를 믿었고, 이듬해 서른 살의 나이로 세례를 받고 권서인이 되어 성경과 찬송과 쪽복음을 들고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그의 삶이 너무 바뀌자 주변사람들은 그가 정신이상자가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41세에 목사가 되어 양양교회를 담임하던 그는, 1919년 양양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릅니다. 출옥 후 독립을 위해 비밀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1920년에 다시 투옥되어 1년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통을 받았습니다.


건강을 상한 채로 출소한 김영학 목사는 당시 아무도 지원하지 않던 시베리아 선교사로 자원하여 1922년 파송을 받았고,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교회와 학교를 세워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볼셰비키 공산혁명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지고 있던 그 곳에서, 교회들은 문을 닫고 많은 선교사들이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김영학 목사는 가족들만 철수시키고 본인은 선교지에 남았습니다. "여기 단 한 사람의 성도라도 남아 있다면 어떤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더라도 떠날 수 없다."


그런 그를 소련 공산당에 제보한 것은 야속하게도 조선 공산당원들이었습니다. 1930년 체포된 그는 옥중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를 위하여 아무 염려도 하지 말며 슬퍼하지도 마시오... 영학의 몸은 주께 바친 희생의 몸인즉 주의 인도를 기다릴 것 뿐이나, 내가 십 년의 징역을 받은 것은 내 사랑하는 원정(아내 이름)과 자녀들이 받은 줄로 생각합니다."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영하 40도가 넘는 마가단 노동강제수용소에서 복역하다가 1933년에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60여년이 지난 1996년에야 한국으로 송환되어,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김영학 목사가 우리 민족의 첫 해외선교 순교자라면, 현재 마지막 해외선교 순교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피흘린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입니다. 2007년 7월 그들의 순교는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우리 민족의 영적 유산입니다.


2022년 7월22일, 주안에서 하나 된 동역자

정진명 형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