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권한으로 이렇게 하느냐? 라는 질문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던져야 한다.
누구의 권위에 기대며 누구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 앞에 묵상하며 꿇어 엎드릴 수 있기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개의 공을 높은 곳에서 떨어뜨렸을 때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당시 천재로 인정받던 학자였기 때문에 모두 그의 말을 믿었다.
이후 1500년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여러 교수들 앞에서 실제 실험을 통해 두 개의 공은 동시에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그런데 이 실험을 지켜보던 교수들의 반응은 방금 눈 앞에서 보았음에도 뭔가 실험이 잘못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일종의 '권위 착시 현상' 이다. 우리 인생에서도 '전문가들이 말한 것이니까 맞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맹목적으로 믿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오늘 본문에도 권위를 착각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성전 세력이 '권위 착시 현상' 에 의해 자기의 삶도 망가뜨리고 자기들을 따라오는 백성들의 삶도 망가뜨렸다.
이런 모든 에피소드를 한마디로 요약해 주는 하나의 질문, '당신은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이 당시 어떤 의미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한다.
1. 예수님이 화내신 이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당도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찬송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종려주일' 로 기념하는 그 사건이다.
그런 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다.
AD 70년경 일어날 예루살렘 멸망과 이후 2천년간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미래까지 보셨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루살렘을 사랑하셨다.
그런데 오늘 성전에 들어가셔서 매서운 일을 행하신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환전하는 상을 뒤엎으시면서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자들' 이라고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평상시 모습과 너무 다른 괴리감 때문에 신학자들도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이 스토리에서 가장 화가 나야 할 대상은 장사꾼들이어야 하는데, 뜬금없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꾀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47절)
두 가지를 다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폭력적으로 보일만큼 화를 내셨을까?
대제사장들은 상인들의 장사를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하고 있는가?
이 배경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의 신앙 고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일 후에 예수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전에 나와서 가르치셨다.
넓은 성전 부지에서 가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 이란 곳에서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면서 예수님에 대한 인기와 지지도가 계속 올라가자 대제사장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넘어뜨려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된다.
20장으로 넘어가서 어느 날 똑같이 가르치고 계셨다.
이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전략적인 질문을 한다.
['대제사장들' 이라는 표현을 먼저 보자면
원래 대제사장은 1명이며 임기는 종신 세습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상징성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더이상 종신직, 세습직이 아니고 임명직으로 바뀌었고 복수의 대제사장이 존재했으며, 로마총독 또는 로마에 의해 세워진 유대왕들이 임명을 했다.
복음서에는 두 명의 이름이 나온다.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
결국 주님께서 원래 세우셨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하나님 나라의 수호자, 예배 및 성전 수호자가 아니라 경제 권력, 정치 권력을 앞장서서 지켜주는 사람들의 세속 수호자가 되어 있었다.
이런 대제사장에게 매우 중요한 일은 권력자의 마음을 사는 일이며 그 방법은 '돈' 이었다.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자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성전의 예배들과 각종 부패한 장사들 이었다.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성전을 이용하고 있는 방법들 속에는 구역질 나는 일들이 숨겨져 있다.
일반 백성들은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어쩔 수 없이 제물을 사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또한 당시 환전상의 수수료는 20~25%,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자기들의 영향력을 빼앗아 가려는 예수 젊은이가 등장했을 때 그들은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종교권력까지 거의 신의 권력을 행사하던 '산헤드린 공회' 의 수장은 대제사장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율법 학자들이 있었고,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실제적 리더십을 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왜 이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다.
동시에 에수님께서 왜 이렇게 화를 내셨는지도 알 수 있다.
성전이라는 곳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인데,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자리여야 할 그 곳이 가장 더럽고 추악한 자리가 되었기에 주님은 뒤엎으실 수 밖에 없었다.
2.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으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많이 생각한 함정질문이다.
'성전에 관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대제사장과 그 분을 지지하고 있는 우리들의 권한인데 어디서 굴러먹던 게 갑자기 들어와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려고 하고 있어?' 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게 되면 예수님은 치명상을 입게 된다.
만약 '하늘에서 주신 권한으로 내가 이 일을 한다' 라고 하면 '신성 모독이다' 라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또는 '나 자신이 취하였다' 라고 한다면 '대제사장에게 합법적 권한이 있는데 넌 지금 없는 권한을 휘두르고 있는 거야' 라고 할 것이다.
우연히 물은 질문이 아니라 전략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치명타를 입히려는 작전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반문으로 물리치신다.
3-4절.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 보겠으니 ~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난 것이냐 사람에게서 난 것이냐'
자기들이 예수님께 질문할 때 사악한 생각을 품었던 것처럼 이 질문 앞에서 위협을 느꼈다.
무슨 의도가 숨어 있을까 따져본 후 그들은 '모르겠는데요' 라고 한다.
그들은 공격으로 느꼈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주신 기회였다.
훅 불면 날아갈 가짜 권위로 만들고 쌓아온 자기들의 인생이 주님께서 지금 열어 놓으신 문, '참 진리',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그 기회를 박차버리고서 '모르겠다' 라고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지금 이것이 진리냐 아니냐,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생명의 길이냐 아니냐, 진짜 가치있는 길인가 아닌가 등은 이미 필요 없었다.
'내가 편할 수 있는가', '내가 보장이 되고 갖고 있는 걸 안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만 관심이 있는 삶의 트랩에 갇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쉽게 옮겨갈 수 있는 유혹을 계속 받는다.
생명으로 시작하였다가 생명 없는 만남이 이끈 사람으로 옮겨 타고, 진리에 대한 간구를 가지고 시작했다가 더 이상 진리가 아닌 '내가 얻는게 무엇인가' 를 따진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셔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시는지는 이미 관심이 없다.
내가 구축해 놓은 내 삶과 삶의 비전을 도와줄 것인가, 거기에 좀 위안이 될 것인가, 그것을 지지해 줄 장소인가 등 이미 이쪽으로 기울어진 교회는 주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능력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지금 예수는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행하시는가 우리가 대답을 해보자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으로 이 일을 하고 계신다.
성전을 둘러싸고 자기들의 편안한 삶을 지키고자 했던 성전 세력들이 지금 대적하고 있는 분은
참 성전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들은 열심히 삶을 살았고 비상한 지혜를 내고 노력을 안하는게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여기 서 있게 되었다.
성전과 가장 가까운 대제사장들이 성전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싶어하고,
말씀을 가장 많이 배운 율법학자들이 말씀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우리 모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창조물과 피조물이 각각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서 하나님 주시는 사랑과 무한하신 자비를 힘입어 우리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주님께만 경배와 사랑을 올려드리고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을 늘 믿고 살아가는 것,
그렇게 부어진 사랑을 가지고 이웃들, 가족들, 친구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잘 다스리라는 아버지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에 마지막 때 아들을 보내셔서 그것을 회복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3.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는 교회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인생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기를 원하는가?
주마음교회는 왜 세워졌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좋은 교회를 다니던 분들인데 왜 새로운 교회가 필요한가?
만약 그 목적이 예수께서 꿈꾸시는 것이라면, 예수께서 회복하고자 하셨던 그 성전이라면, 예수께서 다시 회복하고자 하셨던 자신의 몸된 공동체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정교회 원년을 선포하려고 한다.
가정교회는 집에서 떡을 떼고 모여서 그 안에서 기쁨과 슬픔과 삶과 고난을 나누며 주님을 찬양하는 초대교회 공동체로 돌아가 보려는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가정교회를 해오신 목사님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힘들어' 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힘들다고 하면서 웃고 계신다.
예수님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이 진담인 이유는 진짜 귀찮다는 것,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각자 알아서 잘 살고 있고 굳이 바쁜 세상에서 각 가정에 모여 식사해 가면서 초대하는 과정에서 온갖 번잡한 일들이 벌어질텐데 도대체 이것까지 해서 얻는게 뭔가? 고생하니까 하지 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생이 되더라도, 훨씬 까다롭고 귀찮더라도 예수님이 세우려는 성전이었다면 어떤가?
언제 주님 곁에 가게 될지 모르지만 주님 나라에 가게 됐을 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 한번 해봤다, 예수님이 세우고 싶었던 그 성전을 한번 해봤다는 것.
역사상 기독교의 수많은 사람들이 집에 모여 떡을 떼고 예수 안에 한 몸이요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예전 순박한 사람들이 있었던 시골 동네에서나 가능했다 라는 착시 속에 살다 갔지만,
만약 우리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싶은 사람만 골라서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면 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을 데리고
'예수님이 꿈꾸셨다면 우리도 꿈꿔보자', '예수님이 이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열방까지 구원하셨다면 우리도 이걸 통해 우리 시대에 예수님의 족적을 남겨보자' 라고 한다면 신자들의 마음은 흥분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를 통해, 예수님이 세우시려는 성전을 통해 제자들이 한 몸을 이루고 몸을 부대끼고 모임에 한 가지씩 섬기려고 하며, 안 해도 되었을 그 일을 섬기기 위해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모습을 통해 누군가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견하고,
그 곳에 방문했던 안 믿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은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느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안의 사람들이 갈등도 하고 부딪치기도 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예수가 가르치셨던 산상수훈의 보훈이 그들의 메인의 모임 가운데 도전이 되고 실천이 되고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 있음으로 '정말 저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구나', '신앙생활을 하려면 저런 곳에 가야겠구나' 라고 말하게 되는 그런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고생길이 예상될 것이다.
우리 교회는 힘든 교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운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우고 싶으셨으면 한번 해보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주 목장 선택을 하게 된다.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까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당신의 소원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누구의 권한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소위 세상이 말하는 전문가들,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말해주는 것들에 따라 내 삶의 트랩을 형성하고 있는가?
누구의 권한으로 이렇게 하느냐? 라는 질문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던져야 한다.
누구의 권위에 기대며 누구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 앞에 묵상하며 꿇어 엎드릴 수 있기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개의 공을 높은 곳에서 떨어뜨렸을 때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당시 천재로 인정받던 학자였기 때문에 모두 그의 말을 믿었다.
이후 1500년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여러 교수들 앞에서 실제 실험을 통해 두 개의 공은 동시에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그런데 이 실험을 지켜보던 교수들의 반응은 방금 눈 앞에서 보았음에도 뭔가 실험이 잘못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일종의 '권위 착시 현상' 이다. 우리 인생에서도 '전문가들이 말한 것이니까 맞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맹목적으로 믿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오늘 본문에도 권위를 착각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성전 세력이 '권위 착시 현상' 에 의해 자기의 삶도 망가뜨리고 자기들을 따라오는 백성들의 삶도 망가뜨렸다.
이런 모든 에피소드를 한마디로 요약해 주는 하나의 질문, '당신은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이 당시 어떤 의미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한다.
1. 예수님이 화내신 이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당도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찬송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종려주일' 로 기념하는 그 사건이다.
그런 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다.
AD 70년경 일어날 예루살렘 멸망과 이후 2천년간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미래까지 보셨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루살렘을 사랑하셨다.
그런데 오늘 성전에 들어가셔서 매서운 일을 행하신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환전하는 상을 뒤엎으시면서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자들' 이라고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평상시 모습과 너무 다른 괴리감 때문에 신학자들도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이 스토리에서 가장 화가 나야 할 대상은 장사꾼들이어야 하는데, 뜬금없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꾀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47절)
두 가지를 다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폭력적으로 보일만큼 화를 내셨을까?
대제사장들은 상인들의 장사를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하고 있는가?
이 배경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의 신앙 고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일 후에 예수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전에 나와서 가르치셨다.
넓은 성전 부지에서 가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 이란 곳에서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면서 예수님에 대한 인기와 지지도가 계속 올라가자 대제사장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넘어뜨려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된다.
20장으로 넘어가서 어느 날 똑같이 가르치고 계셨다.
이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전략적인 질문을 한다.
['대제사장들' 이라는 표현을 먼저 보자면
원래 대제사장은 1명이며 임기는 종신 세습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상징성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더이상 종신직, 세습직이 아니고 임명직으로 바뀌었고 복수의 대제사장이 존재했으며, 로마총독 또는 로마에 의해 세워진 유대왕들이 임명을 했다.
복음서에는 두 명의 이름이 나온다.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
결국 주님께서 원래 세우셨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하나님 나라의 수호자, 예배 및 성전 수호자가 아니라 경제 권력, 정치 권력을 앞장서서 지켜주는 사람들의 세속 수호자가 되어 있었다.
이런 대제사장에게 매우 중요한 일은 권력자의 마음을 사는 일이며 그 방법은 '돈' 이었다.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자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성전의 예배들과 각종 부패한 장사들 이었다.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성전을 이용하고 있는 방법들 속에는 구역질 나는 일들이 숨겨져 있다.
일반 백성들은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어쩔 수 없이 제물을 사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또한 당시 환전상의 수수료는 20~25%,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자기들의 영향력을 빼앗아 가려는 예수 젊은이가 등장했을 때 그들은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종교권력까지 거의 신의 권력을 행사하던 '산헤드린 공회' 의 수장은 대제사장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율법 학자들이 있었고,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실제적 리더십을 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왜 이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다.
동시에 에수님께서 왜 이렇게 화를 내셨는지도 알 수 있다.
성전이라는 곳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인데,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자리여야 할 그 곳이 가장 더럽고 추악한 자리가 되었기에 주님은 뒤엎으실 수 밖에 없었다.
2.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으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많이 생각한 함정질문이다.
'성전에 관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대제사장과 그 분을 지지하고 있는 우리들의 권한인데 어디서 굴러먹던 게 갑자기 들어와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려고 하고 있어?' 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게 되면 예수님은 치명상을 입게 된다.
만약 '하늘에서 주신 권한으로 내가 이 일을 한다' 라고 하면 '신성 모독이다' 라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또는 '나 자신이 취하였다' 라고 한다면 '대제사장에게 합법적 권한이 있는데 넌 지금 없는 권한을 휘두르고 있는 거야' 라고 할 것이다.
우연히 물은 질문이 아니라 전략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치명타를 입히려는 작전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반문으로 물리치신다.
3-4절.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 보겠으니 ~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난 것이냐 사람에게서 난 것이냐'
자기들이 예수님께 질문할 때 사악한 생각을 품었던 것처럼 이 질문 앞에서 위협을 느꼈다.
무슨 의도가 숨어 있을까 따져본 후 그들은 '모르겠는데요' 라고 한다.
그들은 공격으로 느꼈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주신 기회였다.
훅 불면 날아갈 가짜 권위로 만들고 쌓아온 자기들의 인생이 주님께서 지금 열어 놓으신 문, '참 진리',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그 기회를 박차버리고서 '모르겠다' 라고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지금 이것이 진리냐 아니냐,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생명의 길이냐 아니냐, 진짜 가치있는 길인가 아닌가 등은 이미 필요 없었다.
'내가 편할 수 있는가', '내가 보장이 되고 갖고 있는 걸 안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만 관심이 있는 삶의 트랩에 갇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쉽게 옮겨갈 수 있는 유혹을 계속 받는다.
생명으로 시작하였다가 생명 없는 만남이 이끈 사람으로 옮겨 타고, 진리에 대한 간구를 가지고 시작했다가 더 이상 진리가 아닌 '내가 얻는게 무엇인가' 를 따진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셔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시는지는 이미 관심이 없다.
내가 구축해 놓은 내 삶과 삶의 비전을 도와줄 것인가, 거기에 좀 위안이 될 것인가, 그것을 지지해 줄 장소인가 등 이미 이쪽으로 기울어진 교회는 주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능력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지금 예수는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행하시는가 우리가 대답을 해보자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으로 이 일을 하고 계신다.
성전을 둘러싸고 자기들의 편안한 삶을 지키고자 했던 성전 세력들이 지금 대적하고 있는 분은
참 성전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들은 열심히 삶을 살았고 비상한 지혜를 내고 노력을 안하는게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여기 서 있게 되었다.
성전과 가장 가까운 대제사장들이 성전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싶어하고,
말씀을 가장 많이 배운 율법학자들이 말씀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우리 모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창조물과 피조물이 각각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서 하나님 주시는 사랑과 무한하신 자비를 힘입어 우리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주님께만 경배와 사랑을 올려드리고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을 늘 믿고 살아가는 것,
그렇게 부어진 사랑을 가지고 이웃들, 가족들, 친구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잘 다스리라는 아버지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에 마지막 때 아들을 보내셔서 그것을 회복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3.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는 교회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인생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기를 원하는가?
주마음교회는 왜 세워졌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좋은 교회를 다니던 분들인데 왜 새로운 교회가 필요한가?
만약 그 목적이 예수께서 꿈꾸시는 것이라면, 예수께서 회복하고자 하셨던 그 성전이라면, 예수께서 다시 회복하고자 하셨던 자신의 몸된 공동체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정교회 원년을 선포하려고 한다.
가정교회는 집에서 떡을 떼고 모여서 그 안에서 기쁨과 슬픔과 삶과 고난을 나누며 주님을 찬양하는 초대교회 공동체로 돌아가 보려는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가정교회를 해오신 목사님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힘들어' 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힘들다고 하면서 웃고 계신다.
예수님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이 진담인 이유는 진짜 귀찮다는 것,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각자 알아서 잘 살고 있고 굳이 바쁜 세상에서 각 가정에 모여 식사해 가면서 초대하는 과정에서 온갖 번잡한 일들이 벌어질텐데 도대체 이것까지 해서 얻는게 뭔가? 고생하니까 하지 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생이 되더라도, 훨씬 까다롭고 귀찮더라도 예수님이 세우려는 성전이었다면 어떤가?
언제 주님 곁에 가게 될지 모르지만 주님 나라에 가게 됐을 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 한번 해봤다, 예수님이 세우고 싶었던 그 성전을 한번 해봤다는 것.
역사상 기독교의 수많은 사람들이 집에 모여 떡을 떼고 예수 안에 한 몸이요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예전 순박한 사람들이 있었던 시골 동네에서나 가능했다 라는 착시 속에 살다 갔지만,
만약 우리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싶은 사람만 골라서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면 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을 데리고
'예수님이 꿈꾸셨다면 우리도 꿈꿔보자', '예수님이 이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열방까지 구원하셨다면 우리도 이걸 통해 우리 시대에 예수님의 족적을 남겨보자' 라고 한다면 신자들의 마음은 흥분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를 통해, 예수님이 세우시려는 성전을 통해 제자들이 한 몸을 이루고 몸을 부대끼고 모임에 한 가지씩 섬기려고 하며, 안 해도 되었을 그 일을 섬기기 위해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모습을 통해 누군가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견하고,
그 곳에 방문했던 안 믿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은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느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안의 사람들이 갈등도 하고 부딪치기도 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예수가 가르치셨던 산상수훈의 보훈이 그들의 메인의 모임 가운데 도전이 되고 실천이 되고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 있음으로 '정말 저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구나', '신앙생활을 하려면 저런 곳에 가야겠구나' 라고 말하게 되는 그런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고생길이 예상될 것이다.
우리 교회는 힘든 교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운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우고 싶으셨으면 한번 해보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주 목장 선택을 하게 된다.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까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당신의 소원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누구의 권한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소위 세상이 말하는 전문가들,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말해주는 것들에 따라 내 삶의 트랩을 형성하고 있는가?
누구의 권한으로 이렇게 하느냐? 라는 질문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던져야 한다.
누구의 권위에 기대며 누구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 앞에 묵상하며 꿇어 엎드릴 수 있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