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문

[2022-03-20] 주일예배 / 누가복음 18:31-43 / 예수의 관심사

주마음교회
2022-07-10
조회수 63

아버지의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았던 큰 아들의 길을 이제 그만 벗어나기 바란다.

이제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문 밖으로 나아가 아직 돌아오고 있지 않는 둘째 탕자들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하기 바란다.


2022년 3월 말을 향해 가고 있는 오늘 나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관심사' 를 얘기해 준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고 한다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그것, 바로 예수님의 관심사이다.


내가 거듭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 중 하나는 바로 나의 관심사에 있다. 


오늘 18장은 9장 ~ 19장에 이르는 거대한 스토리에 포함된 것으로 그 안에서 예수님은 행동으로는 여행을 하고 계셨고, 내용의 핵심 주제는 '제자도' 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어디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가, 우리의 삶의 길, 삶의 방법에 대해 주님께서 가르치고 계신다. 



1. 예수님의 관심사 = 아버지의 뜻 


31절. 열두 제자를 불러 놓으시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를 두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 자신을 '인자' (사람의 아들) 라고 부르고 있다. 


'인자' 라는 말은 에스겔과 다니엘서에 등장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가 인자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예언자들의 예언을 통해 오시리라고 한 그 인자가 나다. 라고 하신 것, 그 메시아 예언들의 주인공이 자기를 통해 성취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강조이다. 

이 땅을 걸으셨던 사람들 중 가장 사람의 아들이라 일컫기 합당치 않은 분이 예수님 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진짜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 을 강조하기 위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성경 신학적으로 '인자' 라는 명칭은 예언자들을 통해 기다리게 했던 메시아의 명칭이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며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자기 안에서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언이라 함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제자의 관심사 또한 내가 오늘을 살아간 결과로 아버지의 뜻이 하나라도 이루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전에 세상의 아들로 살아갈 때는 내가 원하는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신 주님의 제자로 구원받은 자라고 한다면 이제 내가 하루하루, 한 해 한 해 살아갔던 결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되어야 하며 그러면 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에서 행하는 것 가운데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행할 수가 없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에 나의 심판은 정당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마치 온전한 인자이신 것처럼 온전한 순종으로 순간순간을 살아가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범이 되어주셨다. 



2. 최악 뒤에 찾아오는 영광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분들은 '이제 아버지의 뜻을 위해 살아야지' 라는 마음을 갖는다.

그런데 문제는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인가 물어보는 순간 다음과 같은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32-33절. '인자가 이방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채찍질한 뒤에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땅을 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이다.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순간 최악이 되는 것이다. 


예수 제자들이 발견하는 아버지의 뜻도 그와 같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 최악의 시나리오를 살아가는 것이다. 

고통과 핍박이 있고 수치와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아버지의 뜻대로 살든 살지 않든 어차피 고생하는 것은 같지만, 차이점이 있다. 


한쪽은 왜 그런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똑같이 힘들고 아파도 그 길을 왜 걸어가는지 안다. 그 길 끝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기를 기다리고 계신지 알기 때문에 보람이 있고 의미가 있다. 


이는 아버지의 관심사와 예수 제자의 관심사가 동기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의학적으로 분석한 글을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너무 심한 출혈로 인한 쇼크상태로 이미 반 정도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따라오던 여인들은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애들아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예루살렘을 위해서 울어라' 


본인은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다시 부활하실 것인데 이 예루살렘은 이후 2천년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할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들었던 비유가 '푸른 나무의 비유' 이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누가 23:31) 


푸른 나무는 예수님이다.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생명을 공급받고 살아난다. 


그에 반해 사람들은 생명력이 없어 스스로는 절대 살아날 수 없는 마른나무다. 

주님이 없으면 우리는 마른 가지들 이다. 

제자들도 마른 가지였다가 접붙임을 받은 것이다. 


푸른 나무를 이 정도 핍박했다면 마른 나무에게는 어느 정도 핍박하겠느냐 라는 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곧 신자의 삶에 고난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을 선택해서 가다보면 어느 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깨닫고 나서 '주님 제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그 사람은 신자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푸른나무이신 그분이 이 세상의 고통과 핍박과 모욕을 견딤으로써 아버지의 관심사를 이루려고 하셨던 것처럼 아무것도 보잘 것 없었던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나서 주님과 같이 고난받고 고생이 많은 인생임에도 그대로 걸어간다는 것은 신자의 영광이다. 


고난을 당함에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에서 우리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빛나시고 세상은 그렇게 교회와 성도를 빛이라고 부르게 됨을 보게 된다. 


주님을 따라가다가 고통 받는 것이 신자의 영광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일터에서 일 하다가 스트레스 받고 고생하는 것, 집에서 아이 양육하면서 끝이 보이지 않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면서 겪는 고생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고 물을 수 있다.


직접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고생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터에서 골머리 터져가며 버티지 않는다면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겠는가?

그 삶을 영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현장에서 고통과 고생 가운데 버텨가면서 그 시간을 보내야만 우리는 세상에 사는 것이고 세상에서 살아갈 때 빛을 비출 수 있는 것이다. 


아기를 키우면서 '진짜 사람이 죄인 맞구나' 를 깨닫게 되고 그 과정을 견디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아기가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될 수 있겠는가? 


교회에서의 삶과 밖에서의 삶이 별개가 아니라 우리 삶은 하나이다. 

우리의 고통도 한 가지이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도 하나요 목적도 하나이며 관심사도 하나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3. 부활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권력 


33절 끝에 한 마디 덧붙여진 말씀은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3일째 되는 날 새벽에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날이 우리 평생 잊어버릴 수 없는 날임을 깨달았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지금까지 하신 말씀이 모두 진짜 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많은 가르침 중 비대중적인 가르침은 사람들이 너무 싫어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구원자다', '내가 마지막 날 죽은 자도 다시 살릴 것이다' 등


그 중 제일 믿기 힘든 뻥 같은 말씀이 '나를 죽여봐 나는 다시 살아날 거야' 였다.

그런데 제일 듣기 싫었던 뻥 같은 말이 진짜였다.

그러니 나머지 가르침들도 다 사실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믿었는데 다른 것을 못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다 믿는데 다시 살아나는 것만 못 믿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을 때 그분의 가르침의 진실성, 그분이 가진 권력이 드러난다.


우리 차기 정부가 결정됐고 당선인이 하려고 하는 일 중 집무실을 바꾸겠다는 것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력이라는 것이다.

5년짜리 작은 땅덩이의 대통령도 그 정도의 권한을 위임받았는데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권력이 얼마나 어마어마할지 우리는 감히 느끼지도 못한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인데 그 죽음을 한쪽 발로 짓밟으시는 예수의 권세가 여지없이 드러난 날, 그래서 그날은 '주님의 날' (주일) 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을 주기적으로 기념하고 기뻐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 권세를 이기신 예수의 부활이 최악으로 보이는 스토리 끝에 딱 서 있기 때문에 이 전체 스토리는 굿스토리가 된다. 



4. 알면서 선택하신 길


그런데 제자들은 이것을 이해 못한다. (34절)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예수님이 난해한 이야기를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들이 기대하는 바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수용할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라면 자기들이 기대하는 나라를 충분히 세우실 수 있는 분인데 왜 굳이 끌려가서 죽으신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복음 9장에도 예수님이 이 예고를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나서 '다시 물어보기도 무서워하였더라' 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갈 때 그러고 있다. 

혹시 나를 선교지 보내면 어떡하려고 예수님 뜻을 물어보겠는가

나는 이렇게 헌금도 드리고 봉사 정도는 할 테니 주님 더 이상 주님의 뜻을 내게 알려주려고 노력하실 필요 없습니다. 라는 태도로 살아가고 싶어한다.


제자들은 전혀 모르지만 예수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신 것이다. 


'데럴 벅' 이라고 하는 누가복음 주석가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의 죽음은 예기치 않게 온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의 죽음을 약속했고 예수는 예고했다. 그가 겪는 고통들은 그가 자발적으로 알면서 겪은 것이다."


'알면서 겪는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죽음을 선택하신 것이고 통제하고 계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보시기 때문에, 그 부활 뒤의 하나님 나라를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자기를 믿는 백성들을 보시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길로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신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고 통제하고 계신, 그리고 앞으로도 다스리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지금은 조금도 깨닫지 못할 수 있지만 모든 길을 주께서 책임지시는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5. 믿음의 본질 


35절부터 끝까지 나오는 눈 먼 한 사람은 다른 성경에서 '바디메오' 라고 불리는 사람의 스토리이다.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고 거지로서 늘 구걸하면서 살아왔던 이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를 지른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옆에 있던 사람들은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자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용히 하라고 핀잔을 준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약하고 가진 것 없고 불쌍하면 이해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짓밟아버리려고 한다.


그런데 이 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럴수록 더 크게 소리지른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며 기도의 본질이다.


환경과 주변 사람들은 '맨날 기도만 한다고 되겠어?' 라고 하면서 우리 신앙의 의지를 자꾸 꺾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믿음은 그럴수록 더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병을 고치신 후 42절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은 예수님의 관용어 같은 것이다. 

어떤 치유를 하거나 온전케 하실 때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라는 말씀을 계속 하신다.

즉 예수님이 이런 사람을 보고 싶다는 뜻이다. 


주님 만나기를, 주님 손이 나를 만지기를 그렇게 갈급해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 환경이 아무리 나를 덮쳐도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결단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최근에 믿음으로 결단한 일이 있는가?

주님을 만나려고, 주님을 선택하려고 어떤 결단을 해보았는가? 


지금 이 세대는 주님께 대하여 눈감고 있는 세대이다. 

주님을 그다지 보고싶어 하지 않고 주님 관심사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는 소경된 세대, 그 세대 속에서 주님께서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우리 세대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슴을 치며 주님 앞에 부르짖는 몇 명의 사람들을 주님은 기다리고 계신다. 



6. 결론 


예수님의 관심사를 요약해 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지난주 나눈 '둘째 탕자들을 구원하는 일' 


두 번째는 하나님의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고 아직도 내게 없는 것! 하면서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첫째 탕자들을 깨워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다시 세우는 이유는 에덴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흠뻑 받아서 서로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서로에 대해 다툼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기에,

주님은 그들을 다시 부르셔서 주님의 가족으로 만드시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교회이고 주님의 나라이다. 


아버지의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았던 큰 아들의 길을 이제 그만 벗어나기 바란다.

이제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문 밖으로 나아가 아직 돌아오고 있지 않는 둘째 탕자들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하기 바란다.


주께서 원하시는 잔치를 베풀고 그 공동체 안으로 세상을 초대하기 원한다.

그럴 때 우리는 주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영원히 깨닫고 주 예수의 이름, 영화로우신 아버지의 사랑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주의 백성이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