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문

[2022-02-06] 주일예배 / 누가복음 8:40-56 /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주마음교회
202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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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유일하게 건지시고 영원히 사랑하실 사랑의 왕의 옷자락을 붙잡고 이생의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인간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건강에 관한, 안 아프고 잘 사는 것에 대한 많은 염원을 갖고 있다. 

오래 아프면 삶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육신 뿐 아니라 마음의 병도 만만치 않다.

코로나 시국 3년째를 맞으면서 코로나 우울증에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나라 중 하나가 우리나라이다. 


이런 고통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바라보실까?

참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데, 두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얘들아 나를 만져라"  


1. 혈루증에 걸린 여인 


먼저 '회당장' 이 등장한다.

여기 등장하는 회당장은 사랑하는 자기 딸이 아프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단이든지 아니든지, 체면같은 건 차릴 새도 없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배가 땅에 닿도록 엎드린 것이다. 곧 '내가 당신의 종입니다' 라는 의미로서 복종 혹은 예배를 뜻하는 행위였다. 


예수님은 간청을 들으신 후 따라나섰다. 

그 때 예수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한 여인이 있었다. 바로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다. 


오늘날 '혈우병' 이라고 불리는 이 병은 피가 계속 흘러 멈추지 않는 질병이며 이 여인의 병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자궁 출혈'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매우 힘들고 귀찮고 수치스럽고 당황할 만한 상황을 한 두 달도 아니고 12년 동안 보내온 것이다. 

며칠 피가 나고 아파도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12년간 출혈이 멈추지 않은 이 여인의 고통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43절에 의하면 여인은 재산을 다 탕진하도록 여러 의사들을 만나봤지만 결국 고침받지 못했다. 

뭐 하나라도 의지할 만한 것이 있어야 살아갈 소망이 있는 것인데 이 여인은 몸도 아프고 의사들에게 속아서 재산까지 탕진한 것이다. 

힘든 사람이 더 힘들어지고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는 것은 오늘날의 일만이 아니었다.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이라는 감옥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날 때도 일반적 만남처럼 앞에서 다가온 것이 아니라 뒤에서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유대 사회는 출혈 자체가 '부정' 으로 취급되었다. 

레위기 말씀을 보면 '피를 흘린 사람은 7일 동안 부정하고 그가 앉아있던 자리나 만졌던 물건도 하루종일 부정하다' 고 취급한다. 

또한 누군가와 만나서 접촉하면 그 사람도 하루 동안 부정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정한 기간 동안 여인은 격리될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이 여인은 길거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예수님 나를 도와주세요' 라고 말할 수 조차 없었고 예수님도 몰랐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몰래 다가가 손을 댄 것이다.


이렇게 손을 대자 즉시 피가 멈추었다. 순간 병이 치유된 것이다. 

생명의 저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여인의 가냘픈 손을 타고 들어가 그녀를 창조시의 건강으로 회복시킨 것이다.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밀고 밀릴 정도였기 때문에 아무도 모를지라도,

이 여인은 무언가 바뀌었다는 것을 직감했고 예수님은 분명히 아셨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을 알면서도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라고 물으셨다.

이 말이 여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참다 못해서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 밀고 밀리는 사람이 많은데 누가 손을 대었냐고 하시니 너무 예민하신거 아닌가요?' 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만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그저 힘들 뿐이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뿜어져 나온 순간이지만 예수님을 만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아무것도 체험되지 않은 삶일 뿐이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라고 묻는 예수님의 물음이 이 여인에게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음성으로 들려왔을 것이다.

'네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여인의 몸으로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왔니', '왜 이제 왔니' 


여인은 더 숨길 수 없어서 자기가 손을 댄 이유, 낫게 된 경위를 사람들 앞에 설명했다.

다른 공관복음 에는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마태복음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 매우 잘 아는 제자는 아니었지만 이분이라면,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다면 내 삶은 변화될거야 라고 믿은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예수로 대하는 믿음' 이다. 

여기서 역사가 일어난다. 


신앙생활 하는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로 취급하지 않아서 이다. 


결혼해서 첫 아기가 태어나서 차를 샀다. 그런데 아이가 3-4세쯤 되었을 때 아빠가 운전하는 것이 좋아 보였는지 자기를 운전석에 앉혀 달라고 계속 졸라서 시동을 끄고 자동차 키를 숨기고 운전석에 앉혀 주었다. 좋아서 핸들을 돌리는 척 하면서 운전하는 시늉을 냈다. 

그 순간 이 차는 장난감일 뿐이다. 


그런데 다시 아이를 시트에 앉히고 열쇠를 꺼내 시동을 키고 기어를 넣으면 더 이상 장난감이 아니라 차로 대하는 것이다. 차를 차로 대하면 차는 움직인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로 대하면 성경에 기록된 신앙이 움직인다. 

내게 많은 지식과 설교와 성경을 들은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로 대하지 않으면 신앙은 움직이지 않으며 체험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만앙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주님을 취급하는 것이다. 

모든 것의 주인, 만주의 주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주로 대접하고 높이는 것이다. 

그는 생명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내 생명 주께 달렸으니 걱정을 내려놓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때 내 삶이 드디어 움직인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여러 많은 종교 중 어쩌다 우리 집안이 믿기 때문에 혹은 어쩌다 내가 듣고 선택하고 가까워져서 그 교리에 동의하거나 수용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내 삶의 유일한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내 삶의 유일한 목표로 세우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의 유일한 기준과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이 여인이 믿었을 때 예수님은 칭찬하신다.

48절.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어쩌다 하신 칭찬이 아니다. 

복음서를 읽어가면 예수님은 항상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문맥상 백퍼센트 확신을 가진 믿음이라기 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쩌면 예수님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곧 완벽한 믿음이라기 보다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이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떨까? 

우리 믿음은 어디 내놓을만한 것이 못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믿음은 1년에도 여러 번 손바닥 뒤집듯 왔다 갔다 하는 믿음, 정말 내게 믿음이 있기는 하나 의심될 정도의 믿음, 힘들면 손 내밀지만 조금만 평탄해지면 세상과 짝해서 살아가는 믿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며 '주님 나 좀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는 그 작은 믿음도 '그깟게 무슨 믿음이야' 하지 않으시고 '그래 네 믿음을 내가 받노라' 말씀해 주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우리가 신앙을 쌓아 나갈 때 예수님에 대한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 


세상에서 훌룡한 선생님들이나 아버지들은 때로 매우 무섭다. 그리고 기준도 너무 훌룡해서 내가 노력을 해도 다다를수가 없게 느껴진다. 

훌룡한 분의 훌룡한 수준이 내게는 절망이 되는 것이다. 


어느새 우리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때에도 내가 세운 기준을 가지고 판단한다. 

신앙은 예수님과의 관계이다. 곧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된다. 무섭기 때문에 피하고 싶고 예수님이 이 순간을 보면 안될 것 같고, 그래서 진짜 신앙이 아니라 그냥 껍데기만 계속 남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잘 타오르는 성령으로 기름 부으시는 주님 이시다. 


상한 갈대를 상하고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죽음에 손을 대셔서 치유하시고 다시 자라나는 갈대가 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우리가 사랑하고 사모하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너는 평안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이 작은 믿음을 가지고 가서 그를 만져야 한다.


2. 회당장의 딸


회당장의 딸 이야기는 조건이 좀 다르다. 

이 소녀는 스스로 주님을 만질 수 없는 자 라는 것이다.


49절을 보면 예수님이 아직 말씀하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전갈을 보내온다.

'딸이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헛걸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중한 표현이지만 심정은 '죽었어 이제 끝이야 다 틀렸어' 이다.

'내 인생은 이미 망해버렸는데 더 해봐야 뭐해' 


우리가 보는 것이 옳을까? 예수님이 보시는 것이 옳을까?

예수님이 보시는 것이 옳다. 이것이 지혜이다. 


자꾸 연습해야 한다. '나는 틀릴 수 있다', '내가 가장 정확하게 보고자 한 것도 틀릴 수 있다.' 

계속하다 보면 '아, 나는 대부분 틀리구나' 를 깨닫는다.

맞는 것도 있다. 사소한 것, 인생에 별 도움 안 되는 것들.


지금 당장은 임팩트가 엄청 커 보인다. 

그러나 영원을 살아가는 주님과의 동행에 있어서 나중에는 기억도 안 날만한 일이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들은 우리가 거의 다 틀린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생기는 지혜는 '아 나는 대부분 틀리구나' 라고 하면서 겸손해지는 것이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면 사람들하고 싸우게 된다. 


나는 대부분 틀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겸손해져서 '예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보실까?' 여기에 의지하게 된다.

예수님 보시는 것이 실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봤을 때 딸이 죽은 것은 비극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누가 옳은가? 예수님이 옳다. 


내 삶이 내가 볼 땐 비극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볼 때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여기에 아멘 할 수 있으면 그 믿음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믿음이 된다. 


50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다른 말씀 안 하시고 한 가지를 부탁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또 나오는 것은 '믿음' 이다.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없음에도 예수님만 붙잡는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 믿음을 낼 수 없는 환경 속에 있는, 믿을 용기조차 없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하시는 말씀도 '무서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다. 


거룩한 사도들을 통해 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더 발전되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라는 훨씬 전개된 진리로 계시해 주신다. 똑같은 씨앗이다. 


혈루증 여인은 힘들고 수치스럽더라도 자기 손으로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었지만,

이 소녀는 자기 힘으로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죽음의 자리에 있는 이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만져주셨다. 

그분이 우리 예수님 이시다. 


내가 너무 죽음의 자리에 깊이 들어가서 내 힘으로 주님 앞에 나올 수 조차 없었던 그 때

주님은 누군가를 보내셔서 내 손을 먼저 잡아주신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우리를 만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삶의 어느 시점엔가 주어졌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눈이 가려져서 혹은 너무 고통당하고 있어서 주님을 스스로 찾을 수 없을 때조차 주님은 우리를 찾고 계셨고 우리를 따라오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도마의 생각을 한번 해보기 바란다. 


도마는 분명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의심했던 이유는 얼마 전까지 그렇게 대단해 보였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무 무력하게 돌아가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믿음이 너무 흔들려서 '나는 못 믿겠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 내 손 넣어보고 못으로 구멍 뚫린 손바닥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믿겠다' 


너무나 의심하면서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도마를 찾아오셔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래 만져라', '여기에 손을 넣어보고 믿음 없는 상태에 머물지 말고 믿으라' 


예수님께서 혈루증 여인에게 하신 말씀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라는 물음은 

사실 우리를 향해 '얘들아 나를 만져라' 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어느 자리에 있든지 예수님을 향해 손을 내밀기 바란다. 

우리를 유일하게 건지시고 영원히 사랑하실 사랑의 왕의 옷자락을 붙잡고 이생의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